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디우스 1세 (문단 편집) == 평가 == 온화한 성격으로 야심이 큰 편은 아니었던, 역사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학식이 뛰어나고 사려깊은 모습을 보이지만 신체장애 때문에 로마 정치 엘리트의 필요조건인 군복무를 못한 데다 문약하고 심지가 약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황제가 된 뒤로는, 어릴적부터 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직접 배운 기본교육과 정국 파악능력을 기반으로 이를 극복했다. 이때 그는 조부와 역사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건실하게 노력했다. 따라서 '''오늘날 로마 황제 중에서 좋은 선정을 베푼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갖게 된 장애와 충분치 못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성실성과 노력으로 '''제정 시스템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명군'''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서기 2세기 후반~3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에게 좋은 황제, 유능한 황제의 대표격으로 평가받았다. 디오는 그가 가진 지혜, 지식, 성실함, 책임감, 온화한 성격을 좋게 평했다. 이는 디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음에도 내전 없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로마인과 원로원을 억압해 군주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군주제를 만들었고,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시대의 본질이었다고 평가받은 아우구스투스보다도 그 평이 좋다.[* 물론, 디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능함, 원로원에 대한 유연한 태도에 대해선, 그가 좋은 황제의 교과서이라면서 국가의 아버지다운 인물이라고 평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개혁, 내정개혁, 오스티아 건설 등에서 드러나듯, 즉위 전까지 정치, 실무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훌륭한 행정가'''였다. 그의 조부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그를 평가했듯 “정신만 제정신을 차린다면” 어릴 때부터 훌륭한 자질과 기품을 가진 사람답게 보다 많은 정치, 행정, 군사 실무를 쌓았을 것이라는 칭찬 그대로다. 더욱이 그는 즉위 전의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음에도 즉위한 이후 갑작스럽게 발생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정국을 신속히 안정화시켰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와는 달리 황제가 암살당하고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원로원에서는 공화정 복귀를 논하는 혼란한 정국을 24시간 내에 진압하고 즉위하여 제정을 지켜내는 비범한 행보를 보였다.] 달마티아 반란 진압,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문제도 더 큰 혼란없이 해결해 극찬을 받고 있다. 어느 정도로 평가가 좋은지, 냉소적이고 프린키파투스가 원로원의 알맹이를 쏙 빼먹었다고 비판한 디오조차 그를 좋은 황제의 교본 중 하나로 짚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그가 보여준 행정 사무 능력, 원로원 유화책, 관료제를 통한 프린키파투스 완성은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뛰어난 사람인지 증명하는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프린켑스정을 다시 안정화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가 제정 시스템을 이전보다 공고히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즉위 후 새롭게 개편한 원로원과 새롭게 만든 내각, 행정관료 시스템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확립한 체제들을 보강하고 정비한 내각과 관료시스템 부분이 그의 최고 업적이라고 괜히 불리는 게 아닐 정도. 실제로 클라우디우스의 내정 개혁들은 후대 황제들이 방대한 로마 제국을 이전보다 중앙집권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줬으며, 네로 때 제국이 붕괴되지 않고 네로 사후 내전기에 접어든 제국이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 안정을 찾게 된 기반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가 한 제국의 체제 정비는 최고 업적인 오스티아 인공항구 건설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래로 제국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편입되던 [[기사계급]]들은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새로운 개혁 시스템 아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돼 이후 제정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안정되는데 기여하게 됐다. 아울러 그가 즉위 후 밝혔듯이 아우구스투스의 방식을 활용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수정하는 데에 있어서 과거 사례를 통해 재정비한 부분 역시 칼리굴라 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강화된 원수정으로 인한 반발[* 이 부분에서 칼리굴라는 퍼포먼스와 자기 우상화, 정적 숙청의 방법을 사용해 4년 만에 본인이 측근인 근위대장에게 암살되는 결과로 연결됐다. 아울러 그 결과, 자신의 병력과 지나치게 솔직하고 짓궂은 농담조 어투 등이 하지도 않은 일들과 거리의 뜬소문과 결합해 진짜 한 일로 인식되면서 구제불능의 막장 폭군으로 기록되는 불명예까지 얻게 됐다. ~~칼리굴라가 막장 폭군에서, 오늘날 그나마 암군 정도로(?) 재평가되는 부분~~]을 다시 줄어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처럼 __점진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__ 프린켑스의 권한을 키워 나갔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보통 이상의 황제 내지 명군이라고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반면 지나치게 온화한 성품, 부족한 정치 경험, 오랜 시간 소외된 탓에 부족한 자신감은 원로원 내 반대파들과 [[세네카]]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나치게 우유부단하다’, ‘아내나 해방노예에게 이용당한다’ 등으로 까였고, 오늘날에도 그의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보다 더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50대의 나이에 즉위한 이후에도 마땅한 후계구도를 마련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최대 실책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됐다. 실제로 그가 급사한 이후 뒤를 이은 [[네로]]는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에 비해 나이가 많았음에도 제왕교육이 충분치 않은 데다 아직 10대에 불과해, 소 아그리피나가 그의 측근 3인방과 함께 [[네로]] 즉위 초 국정을 좌지우지 하면서 네로 측에 선 세네카, 브루스 등과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는 몇 년 후 네로와 아그리피나 간의 직접적인 권력투쟁으로 확대돼, 네로의 가까운 친척들이기도 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가 모조리 네로 손에 제거되는 비극으로 연결됐다. 또한 정치술이 부족한 까닭에 선량한 의도로 원로원 의원들을 향한 고발과 재판을 신중히 검토해 메살리나, 아그리피나 등의 음모를 막은 부분도 당대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원로원 중심주의자들로부터 오해를 사게 되면서 클라우디우스가 당대에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됐다. 이때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신중하고 선량한 일처리를 평가절하하면서 그를 가리켜 “얼간이 같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황제”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일반 로마 민중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행동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재판에 성실히 출석해 꼼꼼하게 사건을 검토하면서, 억울하게 유죄를 받아 처벌받는 사례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등을 통해 알 수 았듯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속주 총독이나 정무관 주재 재판보다 황제 개인 법정에서의 재판 처리가 증가했다. 반면, 빗발치는 황제 측근과 아내 주도의 음모 사건들의 피해자가 된 원로원 귀족들이나 정적들은 본래부터 그의 장애 등을 이유로 클라우디우스를 미워했고, 그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선정을 베푸는 행위를 한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재판하는 클라우디우스가 직접 재판을 챙겨 검토해 넘어간 사건들을 오히려 “변덕스럽다”, “얼간이 같다” 등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평가는 [[네로|훗날의 황제]]가 했던, 진짜 변덕스러웠고 개인의 욕망을 위한 숙청을 위해 누명을 씌웠던 판결들이 나오면서 그저 까기 위해 깠던 것으로 판단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